뒤죽박죽 이집트 여행 30(왕가의 골짜기와 멤논거상)
뒤죽박죽 이집트 여행 30(왕가의 골짜기와 멤논거상)
2008.01.04. 13:35 왕가의 골짜기(Vally of the Kings)
핫셉수트여왕 장제전의 윗쪽에 사람들이 보였었는데 아마도 그곳이 왕가의 골짜기였나보다. 대절한 택시를 타고 이동해서보니 나의 추측이 맞았다...
태양이 지는 나일강 서쪽 사막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죽어 영혼이 사는 곳이라고 믿었다. 사후에도 영원불멸을 굳게 믿는 파로오는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신과 같이 일정한 세월이 지나면 다시 부활하기를 기원하면서 자기육신을 온전하게 보존하고자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부활은 육신의 온전한 보존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사카라, 기자가 고왕국 시대 왕들의 네크로폴리스라면 왕가의 계곡은 신왕국 왕들의 무덤이 있는곳이다. 이곳에 자신의 시신을 안치하려 한 최초의 파라오는 제18왕조 투트모세 1세(핫셉수트의 부왕)였다. 그는 선대 파라오들의 무덤이 도굴범들에 의해 파헤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굴범들을 소탕하려는 노력에도 근절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투트모세 1세는 아무도 모르게, 알아도 손을 댈 수 없는 바위 속에 무덤을 만들려고 생각했다. 그곳이 바로 왕가의 계곡이었다. 테베에서 가깝고, 강 언덕 뒤로 돌아 앉아 있으며, 더욱이 부드러운 사암으로 된 언덕에 둘러싸여 파라오의 영원한 안식처로 명당이라 할 수 있었다. 투트모세 1세는 건축가 이네니의 도움으로 지하 깊이 그리고 길게 미로를 만들고 무덤 안에 있어야 할 시설-기둥실, 안뜰, 전실, 현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함정을 두고 왕의 시신이 현실에 든 후, 입구를 완전 봉쇄해도록 했다. 입구 표식도 없애고 묘지 건설에 참여했던 인부마저 완전 입을 막아버렸다. 장제전은 가능한 무덤에서 멀고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강변에 두어 자기의 '카(혼백)'를 모시도록 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기행] 중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배자들의 공통점이 있다. 영원히 살고 싶어했으며 죽게되더라도 부활을 꿈꿨다. 죽은자도 죽은자의 뒤를 이어받을 자도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서 대단한 무덤을 만들고 그 무덤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비밀은 없는법이다...늘 등잔밑은 어둡기 마련이다. 걍, 재미로 파라오들에게 이런 노래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들었다(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누구든지 태클 걸지말아주시길...)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날은 바람으로 비오면 비에젖어 사는거지 그런거지
산다는건 좋은거지 수지맛는 장사 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한벌은 건�잖소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없이 살면무슨재미 그런게 덤이잖소
하 하 하............... "
우리 일행은 티켓을 끊었다. 그 티켓이 세 곳의 무덤만 볼수있다는것을 모른채(아니, 코형이 사전조사때 체크했으나 잊어버렸다고한다. 그래서 세 곳의 무덤을 본 후 코형은 다시 티켓판매소로 가야했다...)
그래,이곳이야...우리가 가고자했던 그 곳...ㅋ
티켓 판매소는 아니고 입구의 전시관같은 그런 곳이라고 해야하나?
왕들의 계곡 제작도...
티켓 판매소
서울대공원도 아닌데 코끼리 열차가 있네요...음, 그냥 걸어가기엔 시간이 걸릴듯하고해서...
1인당 4파운드했던 코끼리 열차표
그리고 티켓 70파운드
아래의 사진부터는 표지판에 있는 이름의 파라오들임...
그리고 내부사진도 조금씩(불법(?)으로 찍었던 기억이 있음)
도굴꾼도 몰랐던 투탕카문왕의 무덤
안에들어가면 정말 아무것도 없다...그러나 입장료는 별도로 80파운드다.
그렇다고 안보고 나오면 두고두고 후회할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이 곳을 먼저본후 카이로의 고고학박물관을 봤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2008.01.04. 15:50 멤논거상(Clossi of Memnon)
유적군을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본 멤논의 거상. 이건 길거리 바로 옆에 설치되어 있어서 관람료는 공짜다. 나도 여기서 관리인 복색을 하고 구경하는 사람들한테 박시시나 함 뜯어봐?
위의 글은 코렐리형의 블로그에서 퍼왔다...아마도 관리인 복장으로 박시시 뜯으면 금방 부자될것 같네.
뭐, 그건그거고 이런것 우리집앞에 하나씩 세우두면 좋으려만 땅이없어서리...
• 투탕카멘의 무덤
너무나도 유명한 무덤으로 20세기 초에 발굴되었으며 현재 황금마스크를 포함한 수많은 부장품이 카이
로의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왕의 미이라는 지금도 현실에 안치되어 있다. 현실 정면의
벽에는 오시리스 신의 모양을 한 투탕카멘 왕과 후계자인 아이 왕이 묘사되어 있다.
투탕카멘의 묘 발굴 역사
왕들의 골짜기.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길이 500m, 너비 1㎞인 음산한 골짜기. 이집트 나일강 중류
의 룩소르 서쪽에 있는 이 골짜기는 지금으로부터 3천∼4천년 전 이집트를 다스린 파라오(왕)들
의 무덤이 들어찬 곳이다. 왜 왕들은 이렇듯 도읍지에서 멀리 떨어진 음산한 골짜기의 벼랑과 바
위 틈에 그들의 주검을 숨겼을까. 왕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이 죽은 뒤에 머무를 곳으로 피라미드
를 세웠다. 또 영혼이 다시 찾아들도록 자신들의 시체를 썩지 않는 미라로 만들게 했다. 피라미드
는 어떤 침략에도 견디게끔 거대하게 만들고, 도둑질 당하지 않도록 입구를 비밀에 부쳤다. 그러
나 왕들의 뜻과 달리 피라미드의 보물은 도둑들에게 번번이 털렸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비밀
장소에 무덤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처음 낸 왕은 토트메스 1세였다. 그는 오랫동
안 적당한 장소를 물색한 끝에 자기 무덤을 이 골짜기의 벼랑 틈에 숨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무
덤을 만든 장소를 비밀에 부치고자 잔인한 살육극이 벌어졌다. 왕의 신하는 전쟁포로 100여명을
데리고 무덤을 만든 뒤 그들을 모두 죽였고, 그 또한 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뒤로 모든 파라오
의 주검은 피라미드가 아니라 ‘왕들의 골짜기’에 숨겨졌다. 그리하여 파라오의 미라들은 약 3천년
동안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이집트 왕가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믿었던 이 비밀장소는 그러
나 안전하지 않았다. ‘왕들의 골짜기’는 1881년 한 미국인 골동품 수집가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
다. 그가 이집트 골동상인으로부터 몰래 사들인 옛 파피루스가 피라미드시대 이후의 왕이 사용했
던 유품으로 밝혀지자 이상하게 여긴 카이로박물관이 조사에 나섰는데, 조사관은 꽤 오랫동안 추
적한 끝에 주민 전체가 무덤도둑인 마을을 찾아냈다. 13세기부터 대를 이어가며 옛 무덤을 도둑질
하고 살아온 쿠르나 마을. 주민 한 사람이 1875년 우연히 ‘왕들의 골짜기’에서 파라오의 무덤을
발견한 뒤로, 마을사람 전체가 공범이 되어 파라오의 무덤을 파헤치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1881
년 7월5일 조사관이 도둑을 앞세우고 ‘왕들의 골짜기’를 찾았을 때 그 동안 파헤쳐진 무덤 64개에
는 옛 유물이 하나도 없었다. 조사관은 도둑의 발길에 마구 짓밟힌 미라들만 박물관으로 옮겼을
뿐이다. 1902년 미국인 변호사 시어도어 데이비스가 이집트 정부로부터 ‘왕들의 골짜기’를 발굴해
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는 12년 동안 무덤 네 군데를 발굴했으나 다 도굴된 뒤여서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1914년에 발굴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발굴권을 넘겨받은
사람은 영국인 귀족 조지 H 카나번. 백만장자인 그는 스포츠와 모험을 즐겼으며 미술품 수집에
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자동차 사고로 크게 다친 뒤 요양을 위해 따뜻한 이집트에 갔다가 무덤을
발굴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는 고고학 발굴이야말로 예술품 수집과 모험을 함께 맛볼 수 있는 멋
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조사해 보니 ‘왕들의 골짜기’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왕의 무덤이 딱 하나
있었다. 투탕카멘 왕의 무덤. 도둑들도 그때까지 이 왕의 무덤을 찾지 못했으므로,그 무덤의 유
물만은 온전히 남아 있으리라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였다. 1906년 카나번이 카이로 박물관을 찾아
가자 가스통 마스페로 교수는 발굴을 맡아 일할 사람으로 젊은 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를
소개했다. 그때 카나번의 나이는 마흔,카터는 서른세 살이었다. 1913년 가을 어느 날,카나번과 카
터가 높은 곳에서 ‘왕들의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터가 골짜기 가운데를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무덤이 람세스 2세, 저쪽이 람세스 6세, 그리고 이쪽이 메르넵타 왕의 무덤입니다. 저 세
무덤을 이어서 만들어지는 세모꼴 안을 파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카터가 투탕카멘의 무덤이 세
모꼴 땅 안에 있다고 믿은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는 시어도어 데이비스가 그 근처 바위 밑에서 투
탕카멘이라고 새겨진 도자기와 금박 입힌 나무상자를 주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흙을 치
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3년을 쉬었다가 1917년부터 다시 시작
했지만 2년 동안 흙을 치우고 다시 2년 동안 장소를 옮겨 땅을 팠어도 무덤 입구는 찾을 수 없었
다. 아직 한 군데 파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저 오두막은 람세스 6세의 무덤을 만들 때 일꾼들이
쓴 집인데, 람세스 6세는 투탕카멘보다 훨씬 뒤의 왕이 아닙니까. 그러니 그 밑은 아직 파본 사람
이 없을 겁니다.” 1922년 11월3일 카터는 그 오두막을 헐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카터가 무심
코 일꾼들이 가리키는 곳을 들여다보니,거기에 바위를 깎아 만든 돌계단이 드러나 있지 않은가.
누가 보아도 무덤 입구로 가는 층계임이 분명했다. 계단 열여섯 개를 파내자 출입문이 나타났다.
문의 틈새에는 투탕카멘의 도장이 찍힌 종이가 붙여진 채 봉인되어 있었다. 아직 아무도 이곳을
통과한 적이 없는 것이 확실했다. 카터가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니,그 안은 돌과 자갈로 꽉 메워져
있었다. 6년이나 기다려온 날.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고 런던에 가 있는 카나번에게 전보를 쳤
다. 11월24일 카나번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두 사람이 다시 봉인을 잘 살펴보니 누군가 뜯었다가
다시 잘 봉인해 놓은 흔적이 있었다. 며칠 걸려 통로의 자갈더미를 치우고 나니 두 번째 문이 열렸
다. 방안에 들어선 네 사람(카터, 카나번, 카나번의 딸과 사위) 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황
금 옥좌를 비롯한 금붙이들이 방안에 가득 차 있었고, 벽에는 화려한 벽화와 돌조각이 황금빛을
받아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수천년 전 이집트 문화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값진 문화재였다. 여태까지의 이집트 문화사를 다시 쓰게 할 보물들. 그 방에는 미라가 없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방이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네 군데 벽을 꼼꼼히 더듬어 보았다. 그랬더니 방
이 2개 더 있었다. 구멍을 뚫고 한 군데를 들여다보니, 온갖 일용품과 장신구가 꽉 들어차 있었다.
그렇다면 또 한 군데 방에 투탕카멘의 미라가 들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잠시 생각을 가다
듬었다. 앞으로 보물이 얼마나 더 쏟아져 나올지 모른다. 그것들이 본디 있었던 자리를 기록하고,
목록을 만들고, 부숴지지 않도록 포장하고,연구실도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전문가의 도움이 많
이 필요하고, 따라서 몇 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러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세계 곳곳에서 전문가들이 달려와 12월6일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다섯달이
지난 1923년 5월13일,1차로 유물을 포장한 상자 34개가 무덤을 떠나 카이로박물관으로 향했다. 거
기에는 일찍이 이집트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1924년 2월
17일 카터는 두 번째 방을 열었다. 그가 돌을 들어내고 구멍 안으로 플래시를 비추자, 20명 남짓한
전문가들은 그 뒤에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바심을 냈다. 안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그 방이야말로 미라를 안치한 현실(玄室)이었다. 금빛
벽은 미라를 넣어둔 엄청나게 큰 겉관이었는데, 어찌나 큰지, 관과 현실 벽 사이에는 한 사람이 겨
우 지나갈 틈밖에 없었다. 카터가 그 앞에 서자 너무도 웅장함에 몸이 굳어지는 듯했다. 길이 5m,
너비 3.3m, 높이 2.73m에 이르는 거대한 나무관은 온통 순금으로 입혀져 있었다. 현실을 한 바퀴
둘러보니, 한쪽 벽에 문이 또 하나 있었다. 그 방에는 커다란 금빛 궤짝이 있고 그 둘레에 여신상
4개가 서 있었다. 그곳은 보물을 모아둔 창고였다. 인간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가장 큰 보물 발견
이라고 일컬어지는 투탕카멘 왕릉 발굴은 무덤을 찾는 데 6년, 유물을 조사하고 옮기는 데 6년이
걸렸다. 1927년 2월3일,네 겹으로 된 겉관이 열리자, 노란색 석영으로 된 돌관이 나타났다. 550㎏
이나 나가는 붉은색 화강암 뚜껑을 들어올리자 마침내 속관이 나타났다. 속관은 주검의 모습을
그대로 본뜬 인형 모양을 하고 있었다. 첫번째 속관의 뚜껑에는 아홉살에 왕이 되어 열여덟살에
죽은 소년 왕의 앳된 초상을 새긴 황금판이 붙어 있었다. 얼굴은 순금, 눈은 흑요석, 눈썹은 푸른
유리로 만들어졌고, 두 손에는 그가 이집트의 왕임을 상징하는 갈고리와 도리깨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우리를 제일 감동시킨 것은 소년왕의 이마에 놓인 한묶음 꽃이었다. 그것은 나이 어린 왕
비가 남편에게 바친 마지막 작별 인사였으리라. 그 꽃다발은 3,000년이라는 세월이 얼마나 짧은지
를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 3,000년은 어제와 오늘에 지나지 않았다. 3,000년 전이 지금 이렇게 우
리 앞에 생생히 펼쳐져 있지 않은가. 꽃 한다발이 옛날과 오늘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피크리스·팔
랑개비국화·노박덩굴·목가지와 만다라 열매들을 소담스럽게 묶은 그 꽃다발은 소년왕이 4월 말
∼5월 중순 사이에 묻혔음을 가르쳐 주었다. 두 번째 속관의 뚜껑에는 예복을 입은 소년왕의 초상
화가 있었다. 두 번째 속관을 들어냈을 때까지도 남아 있는 관은 아주 무거웠다. 두 번째 속관의
뚜껑을 열고 나서야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세 번째 속관은 온통 2.5∼3.5㎜ 두께 순금으로 만들어
져 있었던 것이다. 순금 뚜껑을 열자 마침내 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아마포로 칭칭 감은
미라는 얼굴에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 가면을 쓰고 있었다. 미라를 겹겹이 싼 아마포를 풀어헤쳤
더니 그 안에 온갖 귀한 보석이 143개나 들어 있었다. 열여덟살밖에 안 되는 파라오가 하늘나라로
가지고 가려던 황금 보화는 이토록 엄청난 양이었다. 어느 누가 그것을 어림짐작이나 할 수 있었
겠는가. 미라의 머리를 받친 왕관 모양 베개 밑에는 머리받침이 있었는데,합금되지 않은 순수한
철이었다.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순수한 철제품이었다. 마지막 남은 붕대 한 겹을 벗겨냈
을 때 카터가 대한 왕의 얼굴은 ‘평화롭고 온유한 젊은이의 얼굴’이었으며 ‘세련되고 우아했으며,
우수한 골격을 지녔고, 특히 선이 뚜렷한 입술을 갖고 있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발굴이 한창 무르익던 1923년 4월6일 카나번이 모기에 물려 죽은 것을 시작으로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갔다. 온세계의 신문들은 그것을 ‘파라오의 저주’ ‘투탕카멘으로부터 저주받
은 몇 번째 희생자’ 따위의 제목을 달아 호들갑스럽게 보도했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지만 카터
는 그런 일에 주눅들지 않았다. 1933년 독일 고고학자 게오르그 슈타인도르프는 신문이 발표한 21
명의 죽음을 조사했더니 모두 자연사했거나 발굴과 관계없는 사람의 죽음,또는 우연한 죽음으로
밝혀졌다
<왕들의 골짜기- 파라오들의 비밀무덤, 출처- 민이의 세계문화유산기행 [World Heritage]>
노래하는 멤논의 거상
기원전 15세기경, 이집트의 왕 아멘호텝 3세는 테베 시 근처에 자신의 신전 무덤을 만들면서 그 입구를 지키는 2개의 거상을 세웠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집트인들은 항상 동이 틀 무렵이 되면 이 2개의 거상에서 신비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역시 이 현상을 신비스럽게 생각하던 그리스인들은 이 거상을 전설 속의 반신반인인 멤논이라고 부르며 하루에 한번씩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는 그 멤논이 '새벽의여신'인 그의 어머니 이오스에게 올리는 문안 인사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지진에 의하여 2개의 거상 중 하나가 파괴되어 셉티무스 황제가 그것을 복구하였으나 그 신비스러운 노랫소리는 영영 중단되고 말았다(요즘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 거상으로부터 이상한 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요즘 그 신전 무덤까지 사라진 사막의 폐허에는 2개의 거상만이 쓸쓸한 침묵을 지키고 서 있지만 아직도 호기심 많은 과학자들은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해가 떠오르면서 사막의 기후는 급격한 변화와 함께 거센 기류 현상을 일으킨다.
이 공기의 흐름이 거상의 헐거운 접속 부분을 지나면서 신비스러운 마찰음을 만드는 것이며 복구된 후에 이러한 소리가 영영 사라진 이유는 복구 작업 때 거상들의 헐거운 접속 소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곧 신비스러운 소리의 정체가 오르간 파이프의 원리로서 설명될 수 있다면 이 거상들은 괴상하게 조각된 역사상 유일한 작품이 될 것이다. [펌 출처:까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