뜀의 세상보기/07 Taiwan(Taipei)

2007 Taipei 8

"뜀" & "세인" 2007. 5. 15. 01:08

[2007  Taipei 8]

 

(2007.03.24~26)

 

[타이페이의 3월 26일 이야기 하나 - 고궁박물원]

 

이틀을 묶었던 호텔앞에서 기념찰영...

 

 

고궁박물원

 

청대의 소장품은 전대 왕조인 송대, 원대, 명대 3 왕조와 청대의 유물을 모아놓은 것으로, 중화민국 건국 이후 자금성 북쪽에 위치한 내정(內廷) 에 보존되어왔다. 1914 년(민국 3 년), 중화정부는 자금성 남부에 위치한 외정(外廷) 에 유물진열실을 설치하고 청대의 여름 피서지인 열하(熱河) 와 선양(瀋陽) 고궁의 유물을 옮겨왔다.

중화민국 초기의 군벌이 난립하던 시기, 1924 년 펑위샹(馮玉祥) 이 베이징에 진주하면서 마지막 황제인 부이(溥儀)를 자금성에서 나가게 하고「청대 유물보존위원회」를 설립하고 리위잉(李煜瀛: 스청石曾)을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펑위샹은 "이번에 베이징에 온 것은 부끄럽게도 하지 못한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부의를 자금성에서 쫓아내야만 천하의 후세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다." 라고 밝혔다. 부의가 자금성에 머무는 기간 동안 유실된 유물이 수없이 많았지만 펑위샹의 명령이 시행된 이후로는 더 이상의 유물 유실은 없어지게 되었다.


런던 중국예술국제전시회 대여전시유물 상자 개봉 기념사진

런던 중국예술국제전시회 대여전시유물 상자 개봉 기념사진
(왼쪽 좡쌍이엔(莊尚嚴)과장, 오른쪽 푸쩐룬(傅振倫) 간사, 중간 왼쪽에서 영국 대표 Percival David 경)


이듬해 (1925 년) 10 월 10 일, 고궁박물관이 공식 설립함과 동시에 대외 전시를 시작했다. 그리고 박물관과 도서관을 분리했고 도서관은 다시 도서부와 문헌부로 분리되었다. 1928 년 6 월, 국민혁명군이 베이징에 진출했고 국민정부는 이베이지(易培基) 에게 고궁을 접수 및 관리하도록 명령했다. 10 월에 발표한 "고궁박물관조직법" 을 통해 고궁이 공식적으로 국민정부의 기구로 예속되었고 고궁박물관은 유물, 도서, 문헌 3 개관으로 분리 및 설립되었다.

이페이지 관장 임기 동안, 기존의 유물조사와 도록 작업이 계속되었고 유물전시도 다양해졌다. 또한 간행물과 전문도서의 출판도 추진되었다. 1936 년, 출판물이 수백 종에 이르게 되어 중국대륙에서 고궁박물관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13 년 , 918 사건이 일어난 이후 , 중국 북방지역의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국민정부는 고궁의 유물을 남쪽으로 옮겨갈 것을 결정했다 . 상하이로 운반한 유물은 다시 5 곳으로 분류되었다 . 전체 13,291 박스가 운반되었으며 , 유물진열실과 이화원 ( 頤 和園 ), 국자감 ( 國子監 ) 의 유물 6.066 상자도 옮겨졌다 . 1934 년 , 정부는 마헝 ( 馬衡 ) 을 국립베이징고궁박물관 관장으로 임명했다 . 1935 년 , 고궁박물관은 대표적인 유물을 선정해서 유물진열실 유물과 함께 영국 런던의「중국예술국제전시회」에 참가했다 . 1936 년 12 월 , 고궁박물관은 또한 상하이에 보존하고 있는 유물을 난징의 조천궁 ( 朝天 宫 ) 에 신축된 보관창고에 옮겨 보존했다 .
 
1937 년, 77 사변이 일어나던 해, 고궁박물관은 80 개의 주요 유물박스를 우한(武漢)으로 옮긴 다음 다시 창사(長沙), 꾸이양(貴陽), 안쑨(安順) 등지로 옮겼고 또다시 스촨성(四川) 파현(巴縣) 으로 옮겼다.
 
그후 상하이가 함락되자 , 난징 고궁박물관은 유물연구소와 이화원의 유물 16,000 남짓한 박스를 각각 수육양로를 통해 철수하기 시작했다 . 수로를 통해서는 먼저 양쯔강 유역 한커우 ( 漢口 ) 로 운반한 다음 다시 이창 ( 宜昌 ) 으로 옮겨 총칭 ( 重慶 ) 남북쪽 양안에 있는 보관창고에 보존했다가 다시 서쪽으로 옮겨 러산 ( 樂山 ) 으로 갔다 . 육로를 통해서 유물은 기차를 통해 북상했고 다시 롱하이 ( 隴海路 ) 를 통해 서쪽으로 옮겨 샨시성 ( 陜西省 ) 바오지 ( 寶雞 ) 로 옮겨갔다 . 그리고 또다시 화물트럭을 통해 난정 ( 南鄭 ), 바오청 ( 褒城 ) 으로 옮겼고 최종적으로 사천성 어메이 ( 峨嵋 ) 로 옮겨갔다 . 항일전쟁 기간 동안 , 고궁박물관이 후방으로 옮긴 유물은 여전히 그대로 상자 안에 보관되었으며 , 박물관에서는 당시 이 유물상자들의 안전한 보존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 하지만 이 기간 동안에도 5 차례 전시를 했고 특히 소련에서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


  고궁유물의 운반행로  
고궁유물의 운반행로

고궁박물관의 또 다른 뿌리는 1933 년 난징에 설립된 중앙박물관 준비처로서 ,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의 소장인 푸스넨(傅斯年)이 위원장을 겸임하고 자연, 인문, 공예 등 3 개 분과를 두고 있다. 이듬해 이지(李濟)가 준비처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1937 년, 중앙박물관 준비처의 유물 상자 역시 서쪽에 있는 총칭(重慶)으로 운반되었다. 1939 년 이후, 또다시 쿤밍(昆明), 러산(樂山)으로 옮겨졌다. 마지막에는 스촨성(四川) 의 난시(南溪)로 옮겨갔다. 전란 중에도 중앙박물관 준비처는 전통 수공업, 서북지역의 역사지리, 펑산(彭山)지역의 한대 왕묘 등지에서 고찰과 발굴작업을 벌여 많은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1945 년 8 월, 일본이 항복하자 고궁박물관은 파현(巴縣), 어메이(峨嵋), 러산(樂山)등 세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유물을 총칭(重慶)으로 집중시킨 다음 다시 난징으로 운반했다. 중앙박물관 준비처의 유물 역시 모두 난징으로 옮겨왔다. 정부는 유물진열소를 철폐하고 남쪽으로 옮겼던 유물은 중앙박물관 준비처로 옮겼다.

1948 년 가을, 국공내전의 형세가 역전되자, 고궁박물관과 중앙도서관, 중앙연구원역사언어연구소, 중앙박물관 준비처는 핵심 유물을 선정해서 타이완으로 옮겨가기로 결정했다. 그 해 말, 첫 번째 유물 박스가 해군에 의해 난징에서 지롱(基隆)으로 옮겨졌다. 다음 해, 두 번째 유물이 상선을 통해 옮겨졌고 세 번째 유물은 해군에 의해 옮겨갔다. 고궁박물관이 유물을 타이완으로 옮겨간 것은 총 2,972 상자로,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옮겨간 유물(13,491 상자)의 22% 였지만 중요한 유물이 대부분이었다. 중앙박물관 준비처가 타이완으로 옮겨간 것은 852 박스로 역시 중요한 유물이 많았다.

각종 도서와 유물을 타이완으로 옮긴 이후, 정부는 국립중앙박물관도서관 공동관리처를 설립했다. 공동관리처는 유물을 타이중(台中)현의 위펑(霧峰)향 베이거우(北溝)에 신축한 수장고에 보관하고 방공호를 설치했다. 공동관리처 시기, 유물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도록을 만들며 다양한 서적을 발행했다. 또한 소형 전시실은 대외적으로 개방해서 참관하도록 했다. 이 기간 동안 대표적인 유물을 선정해서 미국으로 보내 워싱턴 박물관등 5 곳에서 전시하고 뉴욕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타이중 베이거우 유물진열실의 외관  

타이중 베이거우 유물진열실의 외관

베이거우는 지역이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관을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 박물관 부지는 타이베이 근교의 와이쐉시 ( 外雙溪 ) 로 결정되었다 . 1965 년 , 신관이 준공되자 행정원은「국립고궁박물관 관리위원회 임시조직 조례규정」을 발표하고 쟝푸총 ( 蔣復 璁 ) 을 박물관관장으로 임명했다 . 신관의 명칭은 국부인 손중산 선생을 기념하는 “ 중산박물관 ” 으로 지어졌다 .
 
고궁박물관이 타이베이로 옮겨진 이후 , 여러 차례 확장하여 진열공간이 점차 확대되었다 . 1968 년 , 도서문헌을 서화처에서 분류해서 주요 유물을 원래의 골동품과 서화를 기물 ( 器物 ), 서화 , 도서문헌 3 처로 개편했다 . 1970 년 , 또한 문헌처 밑에 도서관을 두게 되었다 . 실무는 대략적으로 유물에 대한 재점검 및 정리 , 상세내용 등록이 주를 이루고 다른 기관과 협력과 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 60 년대부터 타이완대학 역사연구소의 중국 미술사 전공의 증설을 도왔고 이것이 타이완대학 미술사연구소의 전신이 되었다 . 이 연구소는 수많은 미술사 연구 인력을 배출하고 일부는 고궁박물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 1978 년 , 국사관과 함께 < 청사고 ( 清 史稿 )> 의 주석을 붙이고 , 국사관과 함께 < 청사고 주석 > 을 정리하여 출판했다 . 고궁박물관 역시 도록와 연구실적을 공개해서 다양한 간행물 , 전문서적 , 도록 그리고 서화 , 기물 , 고적 , 청대의 문헌 등 서책과 족자 , 두루마리 등을 발행했다 . 고궁박물관은 전문인력을 해외로 파견하여 연수 및 고찰하도록 하고 국제학술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했다 . 1970 년의 “ 중국 고화세미나 ” 와 같은 국제학술세미나를 여러 차례 주최하고 주요 유물을 해외에 전시하기도 했다 . 특히 일본 오사카의 “ 만국박람회 ” 와 한국 서울의 “ 중국전시회 ” 를 열어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

  중국고화 세미나 진행현황  

중국고화 세미나 진행현황

장푸총 ( 蔣復璁 ) 관장은 17 년 남짓 역임하고 1983 년 병세로 퇴임한 이후 , 국민당 당사위원회의 친샤오이 ( 秦孝儀 ) 위원장이 관장을 맡았다 . 1984 년 , 고궁박물관은 행정건물을 지어 , 기물과 서화와 도서문헌의 3 처에 있는 유물이 대부분 신축 건물의 지하 2 층에 있는 보관실에 보존되었다 . 본관 진열실이 확대되어 전체적으로 업그레이드 설계되었다 . 보존창고와 전시장소가 모두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고 방화 , 방습 , 내진 설계되었으며 24 시간 방범안전감시시스템이 구축되었다 . 1985 년 , 고궁박물관은 60 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학술강의 및 세미나를 주최했다 . 1987 년 , 고궁박물관은 공식적으로 행정원에 직속된 일급 기관으로 승격되었다 . 이 기간 동안 고궁은 장따첸 ( 張大千 ) 가족으로부터 “ 모예징서 ( 摩耶精舍 )” 를 기증받아 장따첸 선생의 기념관을 설립했다 . 또한 “ 즈산웬 ( 至善園 )” 을 조성했고 1996 년 도서문헌관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

  즈산웬 ( 至善園 ) 의 송펑거 ( 松風閣 )  
즈산웬(至善園)의 송펑거(松風閣)

고궁박물관은 과거의 일부 출판물 이외에 새로운 모음집, 총서, 전문서적, 총서, 특별전 도록 등을 계속 발행하고 있다. 특히 <고궁통신>이 대중적인 <고궁유물월간>으로 바뀌었고 <고궁계간>은 <고궁학술계간>으로 바뀌어 학술적인 성격을 더욱 가미했다. 또한 <해외희귀유물>을 편집하여 타이완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과 공동으로 <경인문연각 사고전서>, <고궁서화도록>, <고궁소장대계> 그리고 <청대 타이완문헌총편> 등을 출판했다.

1989 년 7 월, 고궁박물관은 유물 총정리를 시작해서 1991 년 5 월 작업을 완료하고, 같은 해에 개최한 "중국예술문물세미나"를 성황리에 마쳤다.
 
1980 년 이후, 고궁박물관은 유물을 선정해서 해외전시를 시작했다. 특히, 미국 워싱턴의 "탐험시대의 예술"전시회, 1996 년 -1997 년 동안 미국의 "중화 보물 "순회전시회, 1998 년의 프랑스 파리의 "제국의 기억" 전시가 성공적이었다. 고궁박물관은 민간단체와 합력하여 서양미술 초대전을 열었다. 그 해의 "모네와 인상파 작품"전시, 1995 년의 "르부르궁 박물관이 소장한 명화" 특별전, 1998 년의 "피카소의 세계" 특별전이 개최되었다. 1999 년부터 중국대륙의 유물이 초청전시를 열었다. "삼성퇴(三星堆)의 기적" 특별전과 고궁의 "한대 유물대전" 그리고 "한대의 마왕퇴(馬王堆)" 와 "남월(南越)의 왕묘" 유물 전시를 개최했다.
 
2000 년 5 월, 중앙연구원의 두정성(杜正勝) 원사(院士: 경륜이 높은 학자)가 원장을 역임하여 예술문화의 성격을 강화하고 정치적인 색깔을 없애며 국립박물관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또한 타이완의 성격과 중국과 세계가 함께 발전하는 다원화적인 시각을 강화하면서 미의 보편성을 중시하고 인성에 주목하여 인문적인 성과를 부각시켜 국가민족의 영광을 무한대로 확장했다. 일년간 두정성 원장은 학술연구를 활성화시키고 정기적인 소규모 세미나를 개최하며 전시와 학술세미나를 접목시키는 시도를 했다. "문학과 미술 학술세미나", "청대 문서와 타이완연구 세미나"등이 대표적인 성과이다. 또한 국내외 학자를 초빙해서 전문주제를 가지고 강의를 하도록 했다. 두정성 원장은 전시의 깊이를 중시하여 교육의 효과를 거두었다. "관람전 설명회"를 열어, 박물관 직원과 자원봉사와 초등학교 교사들을 초청해서 다양한 의견과 아이디어를 제안하도록 했다.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왔던 박물관의 참관 동선의 혼란과 외부인의 주차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타이완의 특수한 지질조건을 고려한 내진설계를 위해 과학적인 유물보존을 강조하고 박물관의 장기적인 발전을 고려하여 "고궁박물관의 신세기" 라는 건축계획을 마련 행정원에 5 가지 세무계획으로 나누어 제출하였는데 전시공간, 박물관 외부 교통, 유물보존 그리고 분원의 설립 등을 강조하여 21 세기 박물관 발전의 청사진을 마련했다.

  중국의 보물 미국순회전'의 첫 번째 전시장소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1996)  

'중국의 보물 미국순회전'의 첫 번째 전시장소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1996)

고궁박물관은 지난 1 년간 새 정부의 지원 아래 박물관의 미래와 관련된 2 가지 기간사업을 완료했다. 첫째 "고궁박물관전문인력채용과 승진 심사작업 요강" 을 수정해서 인사관리의 투명성, 공개성, 공정성, 공평성을 강화했다. 그리고 "국립고궁박물관 유물예술발전기금 수입과 지출 관리 및 운영방법"의 입법화를 완료하고 기금위원회와 실무조직을 발족하여 "고궁박물관의 벗"과 고궁박물관 카드를 제안함으로써 기업경영의 마인드와 업무방식을 도입했다.  

이외에 <고궁학술계간> 을 개정하고 영문 격월간지를 반년지로 바꾸어 출판사업을 강화했다. 또한 "리메이수
(李梅樹)백년 기념특별전" 과 "Salvador Dali, 20 세기의 천재"등과 같이 타이완의 전시와 국제적인 전시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시도하여 고궁박물관이 대중 관람객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서고 세계와의 격차를 줄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고궁박물원 홈페이지에서 퍼 옴(http://www.npm.gov.tw/ko/administration/about/tradition.htm)

 

 

 

 

 

대만 고궁박물원 특별전 "大觀-北宋書畵特展" 2. "大觀"

 

"大觀"은 '위대한 경관' 혹은 '장관壯觀'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북송 휘종徽宗의 연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휘종은 建元, 建中靖國, 崇寧, 大觀, 政和, 重和, 宣和 등의 연호를 사용했는데, 大觀도 그 가운데 하나였으며, 1107-1110년의 기간에 해당한다.

대관 연간은 휘종의 재위기간 가운데 가장 건강하고 융성했던 시기였다. 그가 선화宣和 연간에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북송의 예술적 난숙도는 앞선 시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는데, 대관은 그 시기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전시의 제목이 된 '대관大觀'은 중국서화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절정기를 보여주자는 전시목적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여기에 올해가 고궁박물원 창립 80주년을 기념하는 해로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이번 전시에 대한 고궁의 각오는 남다른 면이 있다.

 

(?? 블로그에서 퍼 옴)

 

 

 

 

 

관람을 하면서 사진은 거의 찍지 못했으나 스템프는 열심히 찍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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