뜀의 세상보기/09 Nepal

놈.놈.놈들의 네팔여행 일기 38(카트만두 달발광장)

"뜀" & "세인" 2009. 8. 28. 19:45

놈.놈.놈들의 네팔여행 일기 38(카트만두 달발광장)

 

 

2009.07.17(금) 17:25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는데도 늦은 오후에 카트만두 달발광장에 도착했다. 달발광장, 그들에게는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곳이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관광지다. 늦은 오후란 시간개념때문이었을까? 약간은 조바심이 생겼다. 최대한 마음 편하게 느긋하게 많은것을 보려고 했는데 어쩐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네팔의 옛 왕굴인 하누만도카 앞에 있는 광장으로 Dubar은 왕궁이라는 뜻이란다. 12세기에 건설이 시작되어 18세기 샤왕조, 19세기 라마교 통치자들이 완성했으며 지금의 이 곳은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라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UNESCO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티켓

 

 

그녀는 무엇을 도와줄까? 티켓 판매처

 

 

넵, 잘알겠습니다. 기왕이면 조금더 멋있게 만들지 그러셨어요...

 

달발광장에서의 정신적인 여유는 전혀 느낄수 없었던 점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점으로 남아있다. 정신적인 여유를 없게 만든 이유는 여러가지이지만 그 중의 하나는 예비 밧데리를 숙소에 두고 왔다는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런 된장맞을, 볼것도 찍을것도 얼마나 많은데 띨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덕분에 나는 택시를 타고 숙소를 갔다왔다.)

 

 

바산타푸르다. 정교한 목조조각이 눈길을 머물게 한다는데 못.봤.다. 혹시나 예비 밧데리가 가방속에 있는지에 모든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산타푸르

 

그리고 쿠마리 사원 Kumari Bahal을 지나쳤다. 여행전에 자료조사를 처음한 곳인데 안으로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버렸네. 이런된장맞을...

 

이쯤해서 쿠마리 사원에 관해서 여행전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퍼왔던 자료들중의 일부를 그냥 옮겨둔다. 자료출처를 남기지 못함을 양해바라면서.

 

 

살아있는 여신, 꾸마리 데비 Kumari Devi

 

 

 

네팔의 살아 있는 여신 꾸마리는 힌두 신자들에게 파르바티 Parvati(=시바의 부인)의 화신으로 여겨지며, 불교 신자들에게는 바즈라 데비

 

Vajra Devi로 여겨진다. 꾸마리 제도는 2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데, 카트만두의 말라 왕조 마지막 왕이었던 자야 프라카쉬 왕 King

 

Jaya Prakash 때 최초로 꾸마리 여신을 모시기 시작했다.

 

꾸마리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이 있지만 어쨌든 꾸마리는 32가지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킨 4~5세의 여자 아이 중에서 찾아 생리가 시작

 

되기 전까지 살아있는 여신으로서 모신다. 꾸마리가 되기 위한 자격 조건으로는 네와르인 중에서 사캬 Sakya 족의 후예로 금은세공인의 딸

 

이라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한다. 이 외에도 피부색, 눈색, 머리색, 손 모양, 건강 상태, 걷는 모양 등 복잡한 외모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여

 

러 후보들을 모아 놓고 최종 테스트는 뗄레주 사원에서 이뤄진다. 밤 시간에 공포스런 분위기 속에서 (여신이라면 당연히) 물소, 염소 등의

 

가면이 진열된 사원 내부를 무서워하지 않고 걸어야하며, 전대의 꾸마리가 입던 옷과 장신구들을 선별해 내야한다.꾸마리의 화신으로 선정되

 

면 꾸마리 마할로 옮겨서 생리를 시작하기 전까지 살아있는 여신으로 추앙받는다. 꾸마리는 종교적인 행사를 제외하고는 꾸마리 마할을 떠날

 

 수 없으며 종교적인 행사 때에도 발이 땅에 다서는 안 되는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한다. 특히 매년 9월에 열리는 자야 인드라 축제 Jaya Indra

 

 Festival 기간 동안에는 3일간 카트만두를 순회하며 사람들에게 축복과 번영의 힘을 선사한다. 이 기간 동안에는 네팔 국왕도 꾸마리를 찾아

 

와 축복을 선사 받는다    [출처를 까먹었다] -나머지 자료는  생략

 

 

 

쿠마리 사원

 

 

쿠마리 소녀의 눈 사이에 그려진 제3의 눈을 타카(taka)라 하는데 삼라만상의 이법을 훤히 꿰뚫는 '제3의 눈'이다. 고대 경전을 보면 쿠마리의 신체조건은 까다롭기 짝이 없다. 쿠마리의 신체는 반얀(banyan, 뱅골 보리수의 일종)나무와 같고, 허벅지는 사슴의 그것과 같으며, 목은 고퉁 같아야 하고, 눈꺼풀은 소의 그것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신의 조건으로는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로 빛이 나고 크고 맑아야 하며, 치아는 고른 모양새여야 하며, 몸에는 손톱자국 천연두자국도 없어야 한다. 그리고 몸에는 특정한 표식이 있는 아이여야  하며, 흰소머리들이 있는 방에서 하루밤을 보내야한다. 이런 쿠마리가 물러나야 할때의 이유는 초경이 시작되는 이후, 몸에 상처가 나거나 피가 나면 안되고 열병이나 몸이 아파도 안되며, 치아가 빠지거나 상해도 안되고 큰소리를 내면서 울어도 안되며 여신의 발도 맨 땅을 밟으면 안된다. 이런 조건을 유지하지 못하면 쿠마리의 자격이 박탈된다고 한다. 그럼 또다시 사키아 가문의 혈통중에 왕과 별자리가 맞는 여자아이를 선택하게되겠지.

 

네팔에서는 쿠마리를 비운의 여인이라고 하는데 사원을 나오는 순간부터 누구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신도 인간도 아닌 존재로 머물게 되며, 쿠마리와 결혼하면 오래살지 못한다는 속설때문에 결혼도 힘들게 된다는데 그것참,,,참,,,참,,,

 

 

 

초경이 시작되면 여신에서 물러난다에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여자라면 누구나 경험하게되는것인데 그들의 조건에 맞지않는다? 네팔 여자아이들은 9~12살쯤에 '바라테'라는 의식을 행한다. 12일동안 방에 갇혀 햇빛을 보면 안되고 거울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것 또한 금지된다. 처음 나흘동안은 목욕을 할 수 없고 식사도 쌀만 주게 되며, 나흘째부터 정화의식이 시작되고 화장을 하고 있게 되는데 집안의 여자들이 화장품과 먹을것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이러한 바라테 의식후 태양의 신부(상징적인 의식)가 되면 네팔여인으로 인정받게 된다고 한다.

 

 

 

 

다시 쿠마리로 돌아와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카트만두의 여신은 누가 모실까? 어느 동영상에서 본것같은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다음과 같다.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인 마하잔 가문이 여신을 모시는데 왕실에서 여신을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땅을 내려주고 마하잔 가문은 직접 재배를한 첫 수확물인 벼를 여신께 바친다고 한다. 그리고 마하잔 가문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신의 집에서 잠을 자며 성스러운 물을 따르고 아침엔 설탕과자를 여신상의 입에 붙여둔다고 한다.

 

시바 사원 Maju Deval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행전 아무리 자료를 찾으려고해도 찾지 못했고 자료 진도를 나가지 못하게 했던 그 사원이다. 그냥 17세기 말 멀러 왕조 시대에 박타푸르 황태후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데...

 

 

 

한가하게 사원 계단에 앉아있는 현지인들

 

 

18세기 고르카 왕조의 바하두르 왕에 의해 세워졌다는  시바.빠르바티 사원 Nau D urghs(Shiva Parvati) Mandir이다. 부부의 금술이 좋았었나? 나란히 창밖으로 보고 있네...

 

시바.빠르바티사원을  사진찍고 있는 코엉아...

 

 

 

 드디어 카메라 밧데리가 완전히 소진되었다. 사진을 찍기 위한 방법은 하나였다. 숙소로 갔다오는 방법뿐. 코엉아는 30분만에 돌아오란다. 뭐, 그러마하고 택시로 왕복이동을 했는데 약40여분이 소요되었고 찬바람은 어디서 구경을 했는지 코엉아도 그동안 못봤다고 했다. 즉, 각자 놀았던 셈이지.

 

다시 달발광장으로 돌아온후 그동안 이곳저곳을 보았던 코엉아가 사원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참잘했어요...짝,짝,짝)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겉모습이라도 최대한 보려고 빠르게 움직였고 브리핑은 내가 전문이었는데 코엉아가 간단한 브리핑을 해줬다.

 

1690년 지어져 비쉬누신에게 봉헌된 사원인 나라얀 사원 Trailokya Mohan의 모습이다.

 

 

나라얀 사원

 

 

나라얀 사원을 향해서 무릎꿇고 있는 가루다 동상

 

 

그리고 카스타만다프 사원인데 코엉아는 들어가봤다고 하는데 볼것 없단다. 그래도 본것이랑 안본것이랑은 분명히  하늘과 땅차이다.

 

 

여긴 또 어디였던가? 여행할때도 지금 이 글을 남길때도 헷갈리고 정신없구만...가네시를 모신다는 아산 비나역이었던가?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겐 삶의 현장이다. 관광보다는 삶의 진한 냄새가 더욱 많이 풍겨났던 곳으로 기억된다.

 

 

그들의 삶

 

 뜬끔없이 흰색의 유럽풍의 건물이 다른곳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느니 트리부반 박물관으로 이용되는 건물이다. 1908년에 건설된것으로 런던 국립 미술관을 본 따서 만들었다는 옛 왕궁인 하누만 도카와 연결된 건물로 사하 왕의 실물 크기 초상화가 내부에 있다고 하는데 밖에서 사진만 찍었으니 못봤지...

 

 

트리부반 박물관

 

다시 시바,빠르바티 사원을 찍었다. 부부가 내민 얼굴이 왠지 장난기 가득함을 띤것 같아서 그들을 바라보면서 살짝 웃어주고... 

 

 

시바.빠르바티 사원

 

 

  시바신과 그의 부인 빠르바티가 인간 세계를 내려다 보고 있단다.

 

 

 왕궁의 모습이다. 한번 들어가보고 싶었지만 여건상 불가능 했었고 잠깐이나마 눈으로 바라보는것에 만족하면서 바쁜 발걸음을 옮겼다.

 

 

 

 

 

프라탑 드와자라고 불리우는 프라탑 말라 왕 기둥 King Pratap Malla's Column이다.  사각형의 높다란 기둥 위에 두 손을 모으고 경의를 표하는 왕과 그 주변에 4명의 왕비와 4명의 왕자 동상이 함께 만들어져 있다. 1670년 프라탑 말라 왕이 직접 만든 것으로 그가 바라보는 방향에는 데구딸레주 사원이 있다. 이 데구딸레주 사원 3층에서 국왕이 기도를 올리던 곳이라고 한다.

 

 

 이런 유적에 붙여놓았던 광고전단 옳지않아

 

 

정신없었던 달발광장에서 가장 볼만했었고 기억에 남을수밖에 없는 칼라 바이라브의 모습이다. 칼라 바이라브는 여섯 개의 팔을 가진 분노한 시바신의 화신을 상징하는 검은 석상이다.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다른 손에는 잘려진 사람의 목을 들고있는데, 이는 인간의 거짓말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수세기 전, 말라 왕조 시대에 우물을 파다가 발견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칼라 바이라브에 참배하는 힌두교인

 

 

 

[동영상;칼라 바이라브]

 

 

 

 

 

 

 

 

 

이곳까지 왔으면서도 정신줄 놓고 보느라고 하누만 도카 입구 구경도 못했다.(내가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갔다오는동안 코엉아께서는 잘구경하셨더만..에궁, 부러워라) 그것참 도대체 뭘본겨? 아주많이 아쉽다. 아쉬워...

 

칼라 바이라브에서 바라본 자간나트 사원 Jagannath Mandir이다. 카스타만답이 카트만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면 자간나트 사원은 달발 광장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다. 1563년 마헨드라 말라 왕때 만들어진 2층짜리 건물로 기단부는 3층으로 되어 있으며 48개의 지붕 버팀목에는 에로틱 조각을 새겨 두었다는데 가까이 가질않았으니 볼수가 없었고 사원 내부에는 비슈누와 자간나트(=크리슈나)를 모시고 있단다.

 

 

 

자간나트 사원

 

 

그리고 네팔 여행 둘쨋날 아침 뒷통수만 보고 돌아섰던 딸레주 사원 Taleju Mandir 이다. 카트만두 최대 규모의 사원으로 카트만두 왕국의 주신인 딸레주 여신을 모시고 있는데 이 딸레주 여신은 두르가 여신의 다른 형태인데, 딸레주의 모습으로 숭배되는 지역은 카트만두와 남인도 일부 지역뿐이라고 한다.

 

3층짜리 12기단으로 이루어진 딸레주 사원의 높이는 약 40m로 달발 광장에 있는 건물군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지만 우리같은 관광객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네. 치사하지만 이때만큼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냐고? 어차피 나도 못볼테니까. 참, 고약한 심보다. 그러나 이 사원도 1년에 한 번 있는 다시인 축제 Dasain Festival 기간에는 개방을 한다.

 

 

딸레주 사원

 

 

 

 

 

차분히 둘러본다면 볼것도 많고 그 재미에 한참을 빠져있을수 있었는데 네팔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시간들이었다. 언젠가 다음에 기회가 닿는다면 최대한 지금의 아쉬움을 만회하려고 열심히 볼것 같다.

 

아쉬움을 뒤로한데 달발광장을 떠났다. 여기서 또한번 코엉아의 글을 가져왔다.

 

"우리는 네팔전통 코스요리와 전통무용을 즐기고 싶었다. 저녁 7시부터 공연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이 식당을 아는 택시기사가 없었다. 워낙 식사비가 비싼 곳이라 이름만 대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식당인 줄 알았지만 7~8대의 택시를 붙잡고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도를 보여 주고 대충 설명을 해도 감들을 못잡는다. 이 날은 카트만두에서의 마지막 밤인만큼 멋지게 즐겨보고 싶었지만 그게 안되니... 쩝.

 

(사진생략)

 

우리는 할 수 없이 숙소 주변의 거리로 되돌아가 식사할만한 곳을 찾아 다녔다. 특색도 거의 찾기 어렵고 그다지 감동적인 맛도 없는 네팔음식에 진작부터 식상해진 우리는 이 번엔 안가본 한국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식당 이름이 뭐였더라? 김치전골을 시켜봤다. 맛은 ㅡ,.ㅡ; 경복궁이나 갈걸..."

 

그래서 찾아간 곳은 이름은 괜찮았지만 맛은 별로였던 신라레스토랑...에서의 식사...

 

 

 

 

 볼것을 제대로 보지못했다는 아쉬움에 몸이 더욱 피곤했던 정신적으로도 피곤했던 이렇게 카트만두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