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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들의 방랑기 9 (자은사 대안탑)

"뜀" & "세인" 2010. 8. 7. 16:42

그놈들의 방랑기 9 (자은사 대안탑)

 

2010.07.07~11

 

2010.07.08 (목)

 

 일상생활에서의 버스 탑승 행위는 재미없는 일이지만 여행지에서의 버스는 이동의 수단이면서 그곳의 삶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버스승객들의 여러 가지 표정과 알아들을수는 없지만 들려오는 이야기들과 대중교통 이용 스타일을 관찰하면 그것 또한 여행의 재미기도 하다.

 

 

 

 

 

자은사(慈恩寺)는 두 번째 방문이다. 2002년엔 자은사 정문쪽으로 왔었고 이번엔 뒷편의 공원쪽으로 왔는데 분수가 잘만들어져 있어서 관광객들이나 현지인들이 나들이 하기에는 아주 좋을듯 하다. 특히 꼬마친구들에게는 확실한 놀이터가 되겠지.

 

 

 

분수뒤로 보이는 대안탑

 

 

 

 

철없는 놈놈놈들이 분수에서 물놀이를 하면 좋겠지만 자은사를 보기위해서는 열심히 걸어야 했다. 그리고 도착한 정문쪽에서는 현장법사님 동상이 떡하니 버티고 계서서 살포시 눈인사를 나눴다.

 

 

자은사 뒷쪽에서 바라본 대안탑

 

 

자은사 입구와 현장법사님 동상

 

 

현장법사 동상

 

 

자은사 입구

 

 

2002년 20위안 & 2010년 50위안

 

 

서안성에서 남쪽으로 4km 정도 가면 자은사(慈恩寺)다.  자은사는 당나라의 제3대 황제인 고종이 황태자때인 648년에 돌아가신 자신의 어미니 문덕황후를 위해서 수나라 때의 절터에 새로 창건한 절이다. 

 

 

 

 

자은사와 대안탑을 배경으로 놈놈의 얼굴을 넣어봤다. 음, 좋츤 표정들을 하고 있네. 그런데 코엉아는 왜 안찍은거지? 왜그랬을까?

 

 

 

 

 

 

예전엔 보지 못한것 같은 종

 

 

 

법당 내부의 모습이다.

유럽의 성당에서와는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이 부처에 관해서 조금더 알고 싶지만 한계가 있네.

 

 

 

 

 

 

 

 

 

 

 

 

 

 

논놈은 작전 회의중 다른놈은 찍고 있고

 

 

 

대안탑(大雁塔)은 기러기와 관련이 있는 절이다. 기러기 '안(雁)'을 쓴 이유 몇 가지가 전해져 내려온단다. 그 중 하나는 현장이 서역으로 갈 때 서역의 호로탄이라는 곳에서 길을 읿어서 며칠동안 길을 찾지 못해서 합장하고 염불을 하자 공중에서 기러기 두 마리가 날아와 호로탄을 벗어나게 해 주어서 기러기에 보답하기 위해서 대안탑과 소안탑을 지었다는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로는 석가모니가 수행할 때, 석가모니의 거처가 홍수로 단절되어 열흘이나 음식을 먹지 못하고 물이 물러간 후 공중에 기러기 떼가 날아오자 석가모니가 기러기가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자 기러기가 몇 마리 떨어졌단다. 이에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란 생각에 기러기를 땅에 묻어주고 그 곳에 탑을 세우고 안탑(雁塔)이라고 했단다. 그래서 각지에 세워진 안탑은 석가모니가 수행할 때 열흘동안 굶고도 사악한 생각을 하지 않은 고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현장도 대안탑을 세운것이라고 한다. 세 번째 이야기는 처음 자은사탑을 세우던 날 큰 기러기 한 마리가 자은사에 떨어져서 어린 승려가 기러기를 잡아 털을 뽑고 구워먹으려 할 때 현장법사의 제자 규기가 이를 보고 어린 중에게 "이는 '안왕인데, 일찍이 부처님의 사자가 되어 스승님을 구해 주었는데 어찌 구워먹을 수 있는가?"라고 꾸짖었고 현장법사가 이를 알고 한없이 슬퍼하며 묻어주고 천축국의 사각형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대안탑이라고 하는데 사소한 생명도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이구만.

 

 높게 지어라. 멀리서도 볼수 있다는 것과 가까이 가서 올려다 보았을 때 일단 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대안탑 바로 아래에서 쳐다본 모습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는데 핵심적인 관광지를 또다시 돈을 주고 봐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곳 또한 그랬지만 어쩔수 없지않는가. 내라고하면 내고 들어갈수밖에...

 

 

대안탑 입구

 

 

 

대안탑과 대안탑 티켓

 

 

다시 대안탑 입구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이 곳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올라가면 된다.

 

 

이 자은사 안에 7층으로 이루어진 대안탑이 있는데 당대의 사람들은 대안탑에 올라 자연경관을 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당대의 시인인 두보, 잠삼, 백거이, 이상은 등이 이곳에 올라 부패한 정치를 걱정하면서 시를 남겼다는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권력을 가진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모두 비슷한것 같다.  우리 놈놈놈 역시 그 곳에 올라가서 당대의 모습이 아닌 변화된 지금의 모습을 바라보았는데 아마도 당대의 모습이 훨씬 운치가 있었을것 같다.

 

 

"자은사에서는 번역장소인 번경원(飜經院)을 두어 현장으로 하여금 여기서 번역사업을 주관하도록 상좌로 초빙하였다. 이 탑은 천촉에서 불도를 닦고돌아온 현장법사가 자은사에서 범어로 된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한 것을 보존할 장소가 마땅히 없자 탑을 건립하자고 건의 하였다. 이 탑을 지을 때의 조성과 위용에 대해서는 『현장법사전』에 기록 되어 있다. 이 탑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과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서 현장법사가 손수 벽돌을 운반하는 등 2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완성한 것이다.

 

 

 

 

 

대안탑은 고종의 영휘(永徽) 3년(652)에 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도의 불탑형식을 모방하여 벽돌로 외부를 쌓고 그 안에는 흙을 채운 5층의 전면토심탑(塼面土心塔)이었다. 둘레 140장, 높이 180장(약56cm)이었다. 그런데 반 세기도 지나지 않아 이 탑은 점차 허물어져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측천 시기인 701년에 왕공대신들이 돈을 모아 새로 지었다. 중건된 대안탑은 사각형의 누각식 탑으로, 과거와 마찬가지로 전면토심탑이나 10층으로 증축되었다. 오래지않아 전화로 일부가 허물어져서 7층만 남게 되었다. 탑신의 매층마다 목탑구조 형식을 모방해 푸른색 벽돌로 방(?), 두공(斗拱), 난액(欄額), 돌출한 전주(塼柱)를 만들었다. 현재의 탑은 64m 높이에 1층은 한 변의 길이가 25m인데 층수가 높아질수록 약간씩 체감되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대안탑은 사각진 체감미를 보이기 때문에, 부드럽게 체감하는 소안탑에 비해 딱딱하고 남성적인 느낌을 준다."

 

출처 : 임중혁 교수의 중국 역사 이야기『스무날 동안의 황토 기행』중에서

 

 

계단을 오를때는 덥고 힘들었지만 한 층 한 층씩 올라갈때마다 좋아지는 기분과 시원한 바람을 당대의 사람들도 느꼈으리란 생각이 든다.

 

 

 

대안탑을 내려온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