뜀의 세상보기/10 CHINA

그놈들의 방랑기 14 (병마용 2)

"뜀" & "세인" 2010. 8. 26. 10:55

그놈들의 방랑기 14 (병마용 2)

 

2010.07.07~11

 

2010.07.09. (금)

 

 병마용은 흙으로 빚어진 병사와 말을 이야기한다. 진시황 병마용은 1974년 봄, 임동 지역에 큰 가뭄이 들어 우물을 파다가 발견된 것으로 진시황릉 동쪽에 있는 서양촌(西楊村)에서 감나무 과수원에 우물을 파기로 결정했고 그 때 그 일에 참여한 사람이  생산대장 양배언(楊培彦)과 부대장 양문학(楊文學)이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물을 찾아 여산의 골짜기 입구와 이어진 땅을 파기 시작했고 땅을 판지 일주일 후 1974년 3월 29일, 그들이 원하던 물은 나오지 않고 도용의 파편과 같은 이상한 것들이 계속 나타났다. 내화 벽돌이 깔린 평면이 나타나는가하면 녹슨 청동 화살과 쇠뇌가 발견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벽돌을 부적삼아 베개로 삼고, 청동기는 폐품 회수처에  팔기도 하였다. 출토된 도용을 이상하게 여긴 것은 수리시설 건설 책임자인 방수민(房樹民)이 우물 파는 상황을 감독하러 왔다가 중요한 문화재로 생각해 현문화관에 보고했고 현문화관에서 나온 조강민(趙康民)이 중요한 문화재임을 알아채고, 도용의 파편을 6대의 수레에 실어 임동현 문화관에 옮겨 보관하고 자신이  직접 복구한 다음에 상부에 보고하려고 했기 때문에 두 달간이나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휴가를 보내기 위해서 고향에 와있던 신화사의 기자인 인안온(藺安穩)이 현문화관에 근무하는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현장 방문 후 북경으로 돌아간 후 진시황릉에서 발견된 진대의 무사용이라는 글을 써서 인민일보에 발송하게 되었고 이 글은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어내게 되었고 1974년 7월 15일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들 고고학 발굴팀의 단장은 고고학자 원중일(袁仲一)이었고 처음 발굴이 시작한 곳이 1호갱이었다.

 

 

 

본래 없었던 지붕을 덮어씌워 멋대가리없게 만든 1호갱 입구 

 

 

용갱이 진시황릉 울타리에서 1.5킬로미터 이상이나 떨어져있어 진시황릉과 용갱의 관계를 확정짓기는 어려웠었다. 그러다가  조각난 도용의 몸체 앞에 아직 녹슬지 않고 새것처럼 빛나는 구리 극(戟)이 발견되었다. 구리 극 머리 부분의 안쪽에는 선명하게 ‘삼년상방여불위조사공구(三年相邦呂不韋造寺工口)’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이는 “여불위가 승상이 되고나서 3년째에 만들었다”라는 뜻으로 ‘사공구’는 아마도 구리극을 주조한 공장 이름인 듯하다. 여불위는 원래 양책(陽翟:河南)의 대상인(大商人)으로 조(趙)나라의 한단(邯鄲)으로 갔을 때, 진나라의 서공자(庶公子)로 볼모로 잡혀 있는 자초(子楚)를 도왔다. 그의 도움으로 귀국한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莊襄王)이 되었고, 그 공로에 의해 그는 승상(丞相)이 되어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여졌다. 장양왕이 죽은 뒤 『사기(史記)』에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기록된 태자 정(政)이 왕위에 올랐다. 이 태자 정이 바로 시황제(始皇帝)인 것이다. 이로써 용갱이 진시황릉의 일부분임이 증명되었다.

 

그 역사적인 곳에 내가 두 번째 방문을 한 것이다. 1호갱은 직사각형의 형태로 동서로 230m, 남북 62m, 총면적 14,260㎡, 길이 5m 정도의 갱내에는 동서방향으로 여러 개의 격리된 담을 쌓고 그 사이의 통로에 병마용과 수레가 배치 되어있다.

 

 

 

1호갱 내부의 병마용

 

 

"제1호 갱은 보병과 거병(車兵)으로 형성된 사각형의 진으로 손에는 각종 병기를 든 무사가 6천 명 정도 되고, 수레를 끌고 있는 말이 160필, 전차가 40필이다. 남북 가장자리와 동쪽 가장자리에는 궁노를 들고 있는 무사용이 둘러싸고 있고, 중심부분에는 전차와 수레를 따르는 무사용이 있는데,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다. 이들 무사들은 경장보병(輕裝步兵), 개갑보병(鎧甲步兵), 군리(軍吏), 어수(御手), 거사(車士)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등에는 청동화살이 들어 있는 화살통을 메고 있다. 무사용은 우임(右袵)의 여밈을 하고, 상투는 볼록하며, 상투는 오른쪽을 향해 솟아 있다. 다리에는 끈을 메고, 발에는 코가 네모진 신발을 신고 있다. 제 1호갱의 병진을 보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무렵 전투에서 보병의 위치가 점차 증가해 가는 것을 알수 있다. "

 

[출처:임중혁교수의 스무날동안의 황토기행 중에서]

 

 

왠만한 가이드 책자를 보면 모든 병마용의 모습이 다르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우수성에 대해서 말하지만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설명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여행을 하기전 구입한 위의 책에 나온 몇 줄만 며칠 빨리 읽었어도 병마용을 보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을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살짝 아쉽기는 하지만 마눌님과 딸에게 함께 가고픈 여행지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한 이곳에 다시  오게되면 괜찮은 가이드가 될듯하다.

 

 

 

아, 이런 표정 옳지않아.

 

 

1호갱의 군대배치 어쩌고쩌고인가?

 

 

한 사람을 위해서 엄청난 세월이 흘러도 줄서있군

 

 

1호갱을 덮고 있는 지붕의 모습이다.  병마용과는 어울리지 않는것 같지만,,,

 

 

목없는 병사들도 임무에 충실하네

 

 

 

살짝 가슴에 손올린 찬바람군

 

 

13편에 까칠대마왕이란 닉을 달았다가 비실명객들의 온갖 원성(?)을 듣게 만든 코엉아님

 

 

여전히 발굴중인 모습들

 

 

 

 왠지 게을러보이는 발굴단원(?)들

 

비가 내려서 상당히 습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느긋하게 병마용을 보는것이 쉽지않았고 조금만 부딪쳐도 성깔내는 몇몇 중국인들때문에 한바탕 하려다가 좋은게 좋은것이라고 몇 차례 넘어가기도 했었고...예전의 복잡함은 여전했지만 관람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날씨탓이었는지 서로에게 별로였었다.

 

 

복원후 대기중인 토용들인가?

 

 

 

대기중인 토용들을 배경으로

 

 

역시나 대기중인 토용들

 

 

 

 

조금 느긋하게 보고픈 마음은 있었으나 그럴 분위기가 아니란것을 알고 과감히 2호갱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친절히도 2호갱과 3호갱으로 갈 수있는 안내판이 있었다.

 

1호갱을 나오면서 나홀로 중얼거렸던 말이다.

 

"이 많은 병마용을 만들게한 진시황제여, 정말 대단하시오. 그러나 그 대단함에 감동하거나 박수를 치고픈 생각은 없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