뜀의 세상보기/10 CHINA

그놈들의 방랑기 15 (병마용 3)

"뜀" & "세인" 2010. 8. 27. 14:35

그놈들의 방랑기 15 (병마용 3)

 

2010.07.07~11

 

2010.07.09. (금)

 

 2호갱으로 이동을 했다. 입구에는 우리를 환영해주는 레드카펫이 깔려있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비가 오는 관계로 그렇게 해놨겠지. 그들이 자랑하는 대단한 유적지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에는 없지만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하염없이 사람들이 오가면서 우산의 빗물을 닦아내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바닥의 균형이 바르지 못한지 여러곳에 물이 고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현대식 건물은 대충대충 짓는것 아닌가몰라...

 

2호갱은 1호갱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1976년 4월 23일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1호갱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은 독립된 갱으로 1호갱이 보병갱이라면, 2호갱은 거마(車馬)의 혼합병단이었으며, 직사각형의 1호갱과는 달리 이곳은 L자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길이는 동서 96m, 남북 84m, 깊이 5m, 면적은 6,000㎡로 1호갱의 절반쯤 된다.

 

 

 

 

2호갱 입구

 

 

입구 진입후 로비(?)

 

 

" 제2호 갱에서는 경장용(輕裝俑), 어수용(御手俑), 기병용(騎兵俑), 궤사용(跪謝俑), 장군용(將軍俑), 만마용(輓馬俑), 기마용(騎馬俑) 전차가 발견되었다. 특히 이 갱에서는 89대의 전차가 발견되었다. 대부분 보병인 제1호 갱과는 달리 궁노병, 경차병, 차병, 기병의 서로 다른 부대로 혼성된 것으로 볼 때 강력한 기계화사단이라고 할 수 있다. 최전방에는 궁노병(弓弩兵)으로 구성된 소형의 사각형 진(陣)이 배열되어 있다. 진대의 활은 일반적 활을 뜻하는 인강(引强), 발로 쇠뇌를 당기는 답장(蹋張)이 있었다. 방진의 사방에는 강노를 서서 쏘는 입사수(入射手)가 있고, 방진의 가운데는 궤사수(跪謝手)가 무릎을 끓고 있다. 이것은 적이 접근할 때 사정거리가 긴 쇠뇌를 든 입사수가 발사하고, 근접시에는 궤사수가 활로 번갈아 사격한느 전술을 운용하는 것이다.

궁노방진(弓弩方陣)의 오른쪽은 전차병단이 자리잡고 있다. 세로 8열, 가로 8열의 64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논어(論語)』의 팔일무(八佾舞)가 가로 세로 각각 여덟 명의 춤추는 사람들로 구성된 천자의 의례를 나타내는 것과 동일하여 흥미롭다. 전차마다 갑옷을 입은 세 명의 병사가 타고 있다. 중앙은 운전병인 어수(篽手)이고, 좌우는 전투병이다. 어수는 고삐를 잡고 있는 팔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손은 재갈 끈을 잡은 듯 약간 벌리고 있다."

 

[출처] 임종혁 교수의 스무날 동안의 황토 기행 중에서

 

위의 내용을 한 번 읽어보고 이 곳을 보게되면 의외로 재밌게 볼수 있는 계기가 될것이다, 두 번째 방문임에도 불구하고 미리 준비해간 책을읽지않아서 뒤늦게 집에서 그 감흥을 생각하자니 약간 억울한 생각도 들긴 하지만 어쩌리오. 이번의 실수아닌 실수를 세 번째 방문할때 만회하면 되는것을... 

 

 

2호갱 내부모습

 

 

복원이 되지 않은 모습들

 

 

 

2호갱 내부의 사이드쪽에 전시된 궤사용(跪謝俑)이다.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장면을 상상하면 쉽겠다는 생각이다. "앉아 쏴"의 자세로 근접한 적들을 향해서 날리는 궤사수의 모습이 왠지 프러포즈하는 남자로 보여서 나홀로 살짝 웃고 말았지만 궤사용과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서 철영이도 상철형도 나도 사진 찍기에 바빴다.

 

 

궤사용(跪謝俑)

 

 

 

찬바람 최철영군과 궤사용(跪謝俑)

 

 

코렐리 윤상철엉아님과 궤사용(跪謝俑)

 

 

뜀도령 최윤성과 그리고 그 뒤에서 살짝 함께 찍힌 코엉님과 궤사용(跪謝俑)

 

 

궤사용(跪謝俑)의 뒷태다. 채색된것이 거의 없어졌지만 2,000여년전  만들어졌을때의 화려함을 생각해보면,,,

 

 

궤사용을 지나서 옆으로 이동하니 군리용(军吏俑) 아저씨들께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런 스타일의 토용 모조품을 몇 개 수입해서 호프집 장식용으로 꾸몄으면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여러가지 현실적으로 무리인듯 하고...

 

 

 

중급군리용( 中? 军吏俑)

 

 

고급군리용(高 ? 军吏俑)

 

 

 

입사용의 모습인데 왠지 태권도의 아래막기를 하고 있는듯해서 약간 웃겼다. 멀리 있는 적들에게 활을 쏘는 병사들에 대한 예의로서는 아닌듯 하지만 그때 그렇게 생각하는것은 내마음이니 어찌하리오.

 

 

입사용(入射俑)

 

 

 

출토된 병마용중에서 상태가 완전한 것을 유리에 넣어서 가깝게 다가가서 볼 수 있게 했는데 안마기병용 또한 왠지 방자가 말을 끌고 가는 모습이 연상되었다면 정말 철없는 생각일까?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도 했지만 쉽게 눈길을 뗄수도 없었다.

 

 

안마기병용(鞍马骑兵俑)

 

 

 

뭐, 이런 상태로 발굴되었다는건가?

 

 

여전히 발굴중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군

 

 

 

전차 바퀴 발굴 모습?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세 번째 내가족과 함께 갔을때를 위해서 남겨두는 거다. 병마용을 볼 때  특징을 구분하면서 보는 방법이다.

 

 

"장군용은 머리에 절운관(切雲冠)이라는 모자를 쓰고 있고 가슴과 등에는 장식이 달려 있고, 목에는 머플러와 같은 것을 감았다. 또한 무릎까지 내려오는 중포(重砲)를 입고, 중포 위에는 찰갑(札甲)을 입고 있다. 양손은 무릎 앞에서 마주 잡고 있는데 긴 칼을 짚고 있는 모습이다. 그 복식이 매우 화려한 것으로 보아 장군용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좌용(左俑)은 장군용 옆에 서 있다. 머리에는 장관(長冠)을 쓰고 전포(戰袍)를 입고 있고, 그 전포 위에 전흉갑(前胸甲)이라는 갑옷을 입고 있다. 그것은 폭이 넓은 두 줄의 띠를 어깨 위로 올린 다음, 등뒤에서 ×자로 교차하여 내리고 있는 독특한 모양이다.

이용(吏俑)은 머리에 장관(長冠)을 쓰고, 전포 또는 전포 위에 갑옷을 입고 있다. 군리(軍吏) 가운데 지위가 가장 낮은 이요은 지휘하는 무사용 가운데 숫자가 가장 많은데, 항상 병사용과 함께 배열되어 있다. 보병용(步兵俑)은 실제로는 전차의 뒤를 따르는 갑사(甲士)로, 갑옷을 입지 않은 전포용((戰袍俑)과 갑옷을 입는 개갑용(鎧甲俑)의 두 종류가 있다. 병마용에서 가장 수량이 많은 것은 바로 이러한 보병용이다. 이것은 전차에 소속된 것과 독립적으로 편제된 것의 두 부류가 있는데, 무기와 장비는 큰 차이가 없다.

병사용은 그 신체적 특징에 따라 출신지역을 구별할 수 있다. 이것은 진나라 군대가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 준다. 몸집이 작고 광대뼈가 나온 병사용은 사천성 출신이며, 뺨이 넓고 카이젤 수염을 길렀으며 코가 높은 병사용은 흉노계통이며, 얼굴이 길고 후두부가 튀어나오고 뒤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운 것은 서아시아 계통의 병사이다.

병사용 하나의 무게는 200kg 정도나 된다.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다리부분은 모래를 섞은 점토를 사용했고, 상반신은 점토만을 사용했다. 머리는 틀을 이용해 찍고 그 위에 얼굴 디자인을 했기 때문에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눈, 코, 입이 이렇게 다르게 표현된 것을 보면 상상력만으로 만든 것 같지는 않고 모델을 이용해서 만든 것 같다. 이러한 수작업을 할 때 이들은 그 두상 내부에 무심코 자신의 지문을 남겼다. 2,200년 전의 지문인것이다.

흙으로 빚은 병사용 하나는 약 한 달간 건조시켜 1,000도의 가마에 넣은데, 5일에걸쳐 불의 온도를 서서히 올린다. 이때 온도조절이 핵심기술이다. 점토가 완전히 마르지 않으면 구울 때 균열이 생겨 실패작도 많이 나오게 된다. 하나를 만드는 데는 건조기간을 제외하고도 세 사람이 달라붙어 15일 정도 걸린다. 이곳 병마용을 약 8,000개로 추정한다면 80명의 도공이 조금도 쉬지 않고 실패작을 하나도 내지 않았다고 가정할 때 12년이나 걸리는 대공사였다. 또 이렇게 구워낸 병마용에 일일이 채색을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뚜렷하다."

 

[출처] 임중혁 교수의 스무날 동안의 황토 기행 중에서

 

 

2호갱을 뒤로 하고 3호갱으로 이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