뜀의 세상보기/11 JAPAN

두 놈의 일본여행 17

"뜀" & "세인" 2011. 9. 22. 12:13

 

두 놈의 일본여행 17

 

2011.07.15(금)~19(화)

 

 

 7월 18일(월)

 

 

오락가락하는 비처럼 우리도 오락가락 길을 돌고돌아버렸다. 이정도쯤되면 육체적인 건강과 함께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서라도 또다른 방법을 선택했어야할 시점이었다. 그 방법은 간단했다.  도다이지(東大寺)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되는법이다. 버스탑승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말인데 가는곳마다 타는 방법도 다르고 요금결제 시스템도 다른다. 그곳의 생활이 다른만큼 이해는 하지만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헷갈리게 마련이다. 코엉아님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였나보다. 일본에 와서 지금껏 뒷문으로 탑승하고 하차시 앞문에서 요금을 정산하면서 내렸는데 이곳은 반대로 앞문으로 승차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었던거다. 하긴, 한국도 서울에서는 앞문 탑승과 함께 요금결제 그리고 내릴때 환승 혹은 다음에 탈것을 대비해서 하차시에도 카드접촉을 하지만 강의를 위해서 내가 다녔던 전라도의 한지역은 뒷문 탑승후 내릴때 요금을 계산하는 방법을 선택해서 처음 탑승할때 어리버리가 된적이 있다. 같은 나라에서는 같은 방법으로 탑승과 결제가 이루어지면 좋을텐데...

 

두사람은 아마도 각자의 다른 생각을 가졌겠지만 버스를 탈때만 해도 흡족한 마음이었을것이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나니 걸어갔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다는것을 아는데는 시간이 얼마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리오. 이미 우린 버스요금을 내고 이동해버린것을...이것 또한 여행의 재미아닌가...말은 이렇게 했지만 재미 두 번만 찾으면 발바닥에 불나겠군.

 

 

 

 

짧은 탑승시간동안 찍은 노선도다

 

 

 

일본여행전 이곳에 대한 공부가 소홀했던탓에 제대로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였던지 입구쪽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닌 사슴들이 노니는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알고보니 이곳 나라는 사슴이 상징이라고 한다.  사슴에 대한 관리는 이루어지겠지만 이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풀어놓고 있을수 있다는것이 일단 신기했고 부러운 생각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몸보신을 무진장 좋아하는 한국아찌들이 왔다면 분명히 침을 질질흘렸을것이며 꼬마친구들이 왔더라면 귀여운 사슴이라고 인지하고 있을테니 가까이서 만져보면서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테고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그냥 사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을테고...

 

 

 

 

도다이지를 지키려고 하는것일까? 먹이를 노리는 것일까?

 

 

난 그냥 지나가는 사슴1

 

 

사람과 사슴 한 껏 차이인데 또다른 삶들을 살아가고 있는

 

 

사슴에게 구애받는 언뉘? 아니죠. 먹이를 노리는 사슴들?

 

 

강아지도 못만지는 나로서는

 

 

이렇게 사슴뒤에서 폼만 잡았다

 

 

 

도다이지는 일본의 텐표(天平) 문화를 대표하는 사찰이라고 한다. 텐표 문화는 710년 수도를 헤이죠코(平城京)로 옮기면서 시작되었고 일본인들은 이 시대를 쇼무 천황의 태평성대(724∼749년)라고 부른다. 율령제를 만들고 난 이후 그 통제력이 약화될 무렵이라 정치적으로는 약간 혼란스러웠지만, 불교문화사적으로는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시대로 평가된다. 특히 이 시대는 한반도와 중국의 문화가 그대로 수입되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조금씩 일본식 문화가 창조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는데 난 역사학자가 아니므로 여기까지만 하고 일단 나에게는 와우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들것 같은 느낌이 드는곳에 도착했구나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도다이지의 남대문이다. 일본 느낌이 전혀들지 않았는데 이곳은 못 하나 사용하고 서로 짜맞춘 이런 건축물은 당시 왜에선 구경도 못했던 것이었다.도래인들은 모든 면에서 왜인들과는 다른 앞 선 기술력을 한껏 뽐냈고 이곳의 지배세력은 그들의 도움으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한반도에서 넘어간 불교문화가 나라에 이르러 다시 한 번 꽃을 피운 증표가 바로 도다이지와 이 고장의 많은 고찰들일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한 타입의 금강역사님이 두 눈 부릅뜨고 떡허니 버티고 계신다. 어릴때는 상당히 무서운 느낌이 들었던 금강역사상인데 이제는 가는곳마다 익숙하고 친숙한 느낌이 든다.



 

 

도다이지의 정문인 난다이몬(남대문,南大門)을 바라보면서

 

 

1203년에 세워진 높이 8.4m의  금강역사(金剛力士)상

 

 

남대문을 통과하니 연못이 나왔는데 이곳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사찰이니 권력자들이 이곳에서 뱃놀이는 하지않았을테고 갑자기 궁금해지네

 

 

연못안의 작은섬?

 

 

그리고 남대문보다는 작은 또하나의 문

 

 

을 지나니 나타난 그 곳.

 

대불전...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목조건물로 화재로 소실되어 에도시대에 재건한 것으로 높이 47.5m, 가로 57m, 세로 50m의 세계 최대 목조 건축물인 다이부츠텐이다. 다이부츠텐 주변의 동서남북은 회랑이 둘러싸고 있고, 그 기본 구조는 우리 나라 사찰의 것과 같지만 그 절대적인 규모는 우리 나라에 비해 훨씬 거대하다. 창건 당시에 비해 정면의 폭이 동서로 2칸 정도 좁아지고 모습도 조금 바뀌었지만, 약 16층 높이의 건물인 다이부츠텐은 아직도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아직 대불전에 입장하지도 않은채 많은것을 본것처럼 느껴졌고 나의 호기심을 발동시키기엔 충분했음이다.

 

 

소원을 빌어봐...

 

 

 

인왕상님이 거주하고 계시고...

 

 

 

대불전에 입장하기 위해서 왼쪽편의 매표소로 열심히 걸어갔다.

 

 

열심히 걷고 있음

 

 

입장권

 

 

"내 눈에 비친 비로자나불의 모습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는데 부처님의 법이 필요했던 천황의 정치적 목적 이전에 교키(行基) 스님의 자비와 교화가 이루어낸 일본 불교인들의 ‘초발심’의 산물이었다.

737년 일본 전역에서 천연두가 창궐했다. 20세기초까지 치료약도 예방약도 없던 이 병이 발발해 전국으로 번져갔으니, 당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산으로 도망치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없었다. 어떤 이는 하늘의 신이 일본 땅을 벌하는 것이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천황이 어질지 못해 가축신의 재앙을 입은 것이라고도 했다.

이에 쇼무 천황은 전국의 제후들에게 석가모니상과 협시 보살상을 조성케 하고 『대반야경』 일부를 서사시켜 역병을 진압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천연두는 동(東)으로 동(東)으로 퍼져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큐슈 지역에서는 후지와라노 히로쯔구(藤原廣嗣)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쇼무 천황은 황후와 관인들을 이끌고 왕경인 나라를 버리고 이세로 피난을 갔다. ‘뒤숭숭한 민심을 바로 잡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데….’ 가와치[河內]의 지식사(知識寺)에서 비로자나불께 참배를 하던 쇼무 천황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시방제불의 법신불인 비로자나 부처님의 법으로 민심을 위로하리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우러를 만한 부처님상을 조성해야겠다!’

대형 불상을 조성하기로 결심한 쇼무 천황은 당시 민중들로부터 커다란 신망을 얻고 있는 교키 스님에게 애원에 가까운 부탁을 하게 된다. 이때가 서기 743년.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교키 스님은 조정의 큰 골치꺼리였다. 당시에는 관승이라 해서 정부에서 직접 시험을 치러 승려를 임명했으며, 스님들이 저잣거리에 나서 대중들을 교화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물론 반란의 위험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교키라는 스님은 조정의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공공연히 대중 교화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워낙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우니 함부로 잡아들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사람들에게 천황에게 반하는 설법이나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상황은 역전되어, 쇼무 천황은 민중들의 커져만 가는 불안을 잠재우고 전국민적인 불사를 진행하기 위해 교키 스님에게 간절한 부탁을 하는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스님께서 일본의 민심을 모아주셔서, 전국민의 정성으로 가난과 역병을 물리칠 수 있는 불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교키 스님 또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 땅의 민중들에게 부처님의 광명이 너무도 절실하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결국 70이 넘은 노령에도 스님은 직접 바리때를 들고 비로자나 부처님을 조성하기 위한 탁발에 나섰다. 국가의 안녕도 안녕이려니와 부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불법을 전파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 여겼던 것이다.

어떤 이는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 어떤 이들은 신들 중에서도 가장 높다는 호토케[佛, 일본어로 호토케는 부처님이라는 뜻도 되고, 죽은 조상이라는 의미도 된다]를 위로하기 위해서 크고 작은 불사금을 보태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직접 나라로 가서 불상 조성에 참가했다. 재력이 뒷받침되는 지방의 호족들은 불상에 입히기 위한 금을 기부했다.

나라 도다이지에서 출토된 목간에 따르면 이때 동원된 인원만 연간 200만명에 달했고, 무려 250톤의 청동이 사용됐다. 이렇게 해서 높이 16.2m의 세계 최대 금동 좌불이 조성된 것이다.

 

...."     -법보신문에서-

 

 

하여간 시대와 나라를 떠나서 짱이들 하는 생각과 사고방식만 바뀌면 더욱 좋은 세상이 될텐데 현실적으로는 쉽지않을테고 ...

 

 

 

2층으로 보이고 있지만 내부는 단층의 구조를 가졌다. 소실되기전보다 여러가지 이유로 복잡한 느낌이 든다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있는데 나역시 거대한 불상과 그 옆을 지키고 있는지 함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답답한 느낌이 들었던것도 사실이지만 단순한 느낌일뿐이고...

 

 

도다이지 다이부츠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비로자나불은 앉은 키 16.2m, 얼굴 길이 4.8m, 손 길이 3.6m나 되어 속칭 '나라 대불(大佛)'이라고 한다. 조금 과장인 것 같지만, 이 불상의 손바닥에는 16명의 사람이 올라설 수 있다고 한다. 두 번의 전화를 입어 당초보다 작아진 나라 대불은 무게가 452톤이라는데 실감나지 않네, 사실 이때부터 뱃속이 요동을 치기 시작해버렸다. 대략난감이라고 해야할까? 이 곳 내부에는 화장실이 없음을 직감적으로 눈치를 챘고 그런 생각이 들면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얼른 나가야한다는 결론뿐이었다. 어찌하여 내뱃속은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지...

 

이다음부터는 빠른 사진찍기의 시작이었다. 그냥 찰칵 여기도 저기도 찰칵찰칵...

 

 

 

 

 

 

 

 

대불을 중심으로 한바퀴 빨리 돌아보는데 급급했다. 대불 뒤편에는 창건 당시의 도다이지 모형과 함께 목불상, 사천왕상이 전시 중인데 이 다이부츠텐에서 특이한 것은 다이부츠텐 북동쪽 구석의 '부처님 콧구멍'이다. 이 구멍은 대불의 콧구멍 크기와 같다고 하는데, 바로 일년의 액(厄)을 막아 준다고 믿어지는 구멍이란다.굵은 기둥의 아래쪽에 세로 36cm, 가로 30cm의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데, 바로 이 구멍을 빠져나가게 되면 1년 액땜을 하고 오랫동안 건강할 수 있다고 믿어지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구멍에 들어갔다 나온다는데 일본여행을 끝낼때까지 몰랐다니 완전 어처구니없는 만행을 저질러버렸네. 그래서 적당한 사전공부가 필요한 법이다.

 

 

 

아, 부처님 저는 부처님곁에 조금더 머무르고 싶은데 어찌하여 저를 이렇게도 빨리 몰아내시나이까? 이런 생각도 들지않을만큼 급박해졌다. 이것으로 나의 대불전 보기는 끝나버렸다. 늘 같은 마음이지만 언젠가 다시 찾을날이 올것이다. 그때는 조금더 느긋하게 그리고 부처님 콧구멍으로도 한 번 들어가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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